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그때와 지금] 아이 낳으면 수당·면세·융자 '아리안족 늘리기' 열 올린 나치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인종 말살정책은 독일 역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수치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인종정책의 이름으로 자행된 가공스러운 행위들은 극단적으로 사악한 양상으로 발전했다.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바람직하지 않거나'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범주의 사람들에게는 성적 자유 및 출산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1934년 1월 1일 이후 인종 및 계급에 따른 강제 불임과 출산 제한은 제반 법령을 통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아리안족 부부들에게는 다산을 장려했고 아리안족 여성들의 산아 제한 권리를 폐지했다. 낙태는 엄격하게 처벌되었다. 나치는 초창기의 한 법령을 통해 남편이 직장을 가진 기혼여성의 경우 공직 취업을 금지했다. 결혼을 원하는 젊은 남녀에게는 저리의 융자금이 제공되었는데 신부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 아이들이 한 명 태어날 때마다 출산 수당을 지급하는가 하면 갚아야 할 융자금과 세금을 줄여줬다. 다섯 이상의 자녀를 둔 가정의 경우 세금을 완전 면제해줬는데 이는 모두 독일제국을 완전히 순수한 새로운 인종으로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여성을 '자식을 낳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정주부는 낳는 아이의 수에 따라 다양한 등급의 '어머니 십자훈장'을 받았다(사진).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지 벌써 4년이 되었지만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국가적 재앙 수준이다. 2016년부터는 일할 수 있는 인구가 감소하리라는 전망이다. 잔인한 인종주의와 여성의 자율성 상실이라는 나치 독일의 행태에 소름이 돋지만 그들의 출산 장려 정책 자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6-29

[그때와 지금] '미래를 준비하라' 부친 가르침, 해군 창설로 답한 손원일 제독

올해는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1909~1980) 제독 탄생 100주년이다. 중국 지린성 문광중학을 졸업할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부친 손정도 목사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들려주었다. "지금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간절히 독립을 바라지만 일본이 곧 망하거나 금방 독립이 성취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당한 기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실력을 갖춰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 앞으로는 과학사회와 산업사회가 전개될 것인데 그때는 개인의 실력과 능력이 가장 중요하게 될 것이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살라는 부친의 훈화는 그의 삶을 이끈 나침반이자 등대였다. 16세 되던 1925년 '후테이센진' 즉 '요주의 조선인'으로 일제의 경찰기록에 이름이 오를 만큼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던 그는 27년 대륙 제일의 항구 상하이를 보고 바다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3년 뒤 상하이 중앙대학교 항해과를 우등으로 졸업하자마자 독일 연습선에 승선해 항해기술을 더 연마할 기회를 얻었다.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을 맞아 그는 해군 만들기에 나섰다. 45년 8월 21일에는 해사대를 그리고 11월 11일에는 해군의 뿌리가 되는 해방병단을 세웠으며 48년까지 38척의 함정도 확보했다. 49년 12월 17일 뉴욕 부두에서 열린 백두산호 이양식에 참석한 장면 주미대사(사진 가운데) 왼쪽의 제복 입은 이가 손 제독이다. 그의 선견지명은 6.25전쟁의 승패를 가른 인천상륙작전 때 빛났다. 그는 미국에서 들여온 백두산호를 비롯한 4척의 전함에 자신이 창설한 해병대를 태우고 선봉에 섰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6-26

[그때와 지금] 학문으로 신념 표출한 막스 베버, 우리 대학가 '폴리페서'에 경종

자본주의 발전에서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 사회학자로 널리 알려진 막스 베버(1864~1920.사진)는 독일의 국가주의.권위주의.관료주의에 맞서 싸운 비판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독일제국의 역사(1871~1918)와 거의 일치한다. 독일은 1871년에 이르러서야 서유럽 국가들 중 마지막으로 통일을 이룬 '지각한 국가'였고 통일의 중심에는 토지귀족 출신의 비스마르크가 있었다. 베버와 그가 속한 시민계층은 정치적으로 비스마르크의 '아들'이었다(김덕영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그들은 비스마르크가 구축한 독일제국에서 태어났고 그 기반 위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시민계층은 자신을 '아버지'인 귀족계급과 동일시했다.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을 지닌 독자적 사회집단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봉건화.귀족화되어 가고 있었다. 베버는 비스마르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물론 독일 통일의 업적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서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독일에서는 시민계층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족세력이 통일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베버는 인정했다. 국가의 통일은 아버지의 업적이므로 아들은 이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의미는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만약 무대에 계속 남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지금까지의 공로도 퇴색하고 말 것이었다. 이제 아들이 역사의 무대에 설 차례였고 그 아들은 다름 아닌 시민계층이었다. 서울대가 '폴리페서'들을 규제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오히려 양성화하는 내부 규정을 마련했다가 반대 여론에 밀려 보류했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권력'을 택하건 '학문'을 택하건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학생 수업권과 대학 운영에 지장을 주는 인사들이 과연 개인적 영달을 넘어서서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할 수 있을까.

2009-06-25

[그때와 지금] 오바마 부친과 화해한 미 백인, 동족끼리도 '소통' 안 되는 한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는 오바마의 친아버지(오바마 시니어.사진.1936~82)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케냐 출신인 오바마 시니어가 1960년대 초 하와이대에서 공부하던 시절 하루는 백인인 그의 장인(오바마 대통령의 외조부)과 친구들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와이키키 바'라는 동네 술집에 가서 합석했다. 술집에 있던 사람들은 기타 연주를 들으며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백인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깜둥이 옆에서는 좋은 술을 마실 수 없어!"라고 말했다. 갑자기 술집이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오바마 시니어를 바라봤다. 한판 싸움이 벌어지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백인에게 다가가 미소를 짓고는 편견의 어리석음과 '아메리칸 드림' 그리고 인간이 가진 보편적 권리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백인은 미안했던지 주머니에서 돈을 100달러나 꺼내 오바마 시니어에게 줬다. 그 돈으로 그날 밤 술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공짜로 술을 먹었고 남은 돈으로 오바마 시니어는 그달치 집세를 냈다. 하지만 아무리 옳은 말도 '싸가지 없게' 하면 용납하지 않으려는 감정과잉 사회 합리적 설명을 들어도 '패거리의 이익'에 어긋나면 한사코 귀를 틀어막는 소통불능의 우리 풍토에서는 오히려 '흑인이 하는 옳은 말'을 듣고 즉석에서 잘못을 사과한 '그른 말을 한 백인'이야말로 오바마 시니어 못지않게 대단한 인물로 보인다. 합리성.도덕성을 내면화한 '근대적 개인'은 우리에겐 아직 요원한가.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6-22

[그때와 지금] 만담계의 단짝 장소팔과 고춘자, 어렵던 시절 웃음 준 대중의 스타

"춘자야." "네 아버지." "비가 몇 도냐?" "끓는 물은 백도인데 글쎄요. 비가 몇 도예요?" "비가 몇 도냐 하면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유행가에 들어있어. 비가 오~도다." 1963년 장소팔(본명 장세건 1923~2002)과 고춘자(본명 고임득 1922~1994)가 펼친 따발총 만담의 한 대목이다. "그나저나 왜 이름이 장소팔이에요?" "장에 소 팔러 간 사이에 낳았다고 장소팔이라오." "어머나 그러면 가족들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형님은 중팔이 아버지는 대팔이 우리 할아버지는 곰배팔이라오." 만담은 조선시대 서울.경기의 연희예술이었던 '재담소리'에서 출발한다. 소리와 춤 사이에서 흥을 돋우는 말잔치였던 재담은 일제시대 독립적인 '개그'인 만담으로 이어지고 신불출이라는 불세출의 스타를 낳는다. 장소팔은 신불출을 잇는 만담계의 거장이다. 초등학교 학예회 때 '손오공' 역을 맡았을 때 당시 일본에서 유명했던 만담가인 오성련의 눈에 띄었다. 오씨는 장소팔을 일본으로 데려가 만담 공부를 시켰고 42년 연예계에 데뷔한다. 고춘자는 원래 가수 지망생이었다. 일제 말기 연예위문단에 뽑혔고 해방을 맞았을 때는 함경도 아오지탄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후 서울에서 악극단 활동을 하면서 만담가가 됐다. 두 사람은 50년대 군 위문공연 때 만나 단짝이 됐다. 어수룩하면서 엉뚱스러운 장소팔. 서글서글한 눈매에 쉰 목소리를 지닌 고춘자. 전쟁 이후의 비참과 가난 속에서 웃고 싶었고 말하고 싶었던 대중들은 그들의 말재간에 시름을 잊었다. 걸작은 '딸라부인'이었다. 딸이 일곱이라 고민하는 얘기 끝에 장소팔은 딸을 아들로 바꾸는 데가 있다고 말한다. "내가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웬 부인들이 '딸라 바꿔요 딸라 바꿔요'라고 속삭이지 않겠어?" 사회풍자가 살짝 섞인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은 배꼽을 잡게 했다. 60년대 장소팔-고춘자는 '내 강산 좋을시고'라는 명승고적 탐방 만담쇼로 라디오 시대의 절정을 누리지만 70년대 TV가 보급되면서 퇴장한다. 이를 안타까워한 장소팔은 96년 만담보존회를 설립해 활동하기도 한다. 그의 아들 장광혁은 유머 컨설턴트가 됐다. 이제 '장-고 콤비'는 후배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다. 예능프로 '패밀리가 떴다'의 '유재석-대성' 콤비 '웃찾사'의 기글스 박영진-박성광의 개그 '박대박2'에는 '장소팔-고춘자 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힘든 시절을 웃겼던 추억의 수다가 이 시대 웃음의 피와 살로 녹아든 셈이다.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

2009-06-21

[그때와 지금] 첫 유학생 유길준의 '서유견문'

한 세기 전 최초의 유학생 유길준(사진)이 유학길에 오를 때만 해도 금의환향의 지름길은 여전히 과거 급제였다. 1881년과 1883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과 미국 유학은 예기치 못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두 번 다 1년 반도 못 돼 끝나 버렸다. 그러나 1884년 미국 유학 중 찍은 하이칼라 머리를 한 유길준의 사진은 전통적 출세의 길을 차버리고 신문명을 따라 배우려한 그의 결심을 손에 잡히게 보여준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그가 큰 뜻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나래를 접게 만들었다. 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한 원세개는 이 땅의 사람들이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품지 못하게 억눌렀다. 청운의 뜻을 품고 떠난 일본 유학생들이 줄소환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참극이 빚어졌다. 영어와 국제법에 밝은 인재에 목말랐던 고종은 그에게 귀국을 명했다. 그러나 1885년 말 제물포로 돌아온 그를 맞은 것은 활짝 열린 등용문이 아니었다. 박해의 손길을 피해 그의 식견을 활용하려 한 고종과 측근들이 짜낸 고식책은 연금이었다. 7년 남짓 궁중의 자문에 응하며 권력의 비호 아래 간신히 목숨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앞서 보고 깨달은 자의 의무를 다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1894년 4월 1일 일본에서 출판된 '서유견문'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 책은 당대 한국인들의 세계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서양 문물 소개서이자 근대화의 필요성과 방법을 역설한 개화 사상서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바깥세상을 보는 동포들의 눈이 뜨이고 귀가 터지길 바란 그의 소망은 1896년 아관파천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일본으로 몸을 숨겼으며 나온 지 채 2년도 못 돼 망명객의 책은 금서가 되고 말았다. 20만 부 이상 팔린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은 일본인들을 근대 국민으로 바꾸는 데 이바지했지만 자비로 1000부를 찍은 '서유견문'은 당대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유학을 통해 얻은 지식을 동포들의 안목을 넓히는 데 쓰일 수 있도록 부단히 되돌리려 했다. '세계대세론'(1883) '중립론'(1885) '노동야학독본'(1908) 그리고 '대한문전'(1909) 등 그가 남긴 논저들은 일관된 그의 삶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성취를 동포와 함께 나누려한 선각자였다. 지구촌 이곳저곳에 우리 유학생들이 차고 넘치는 유학 전성시대를 사는 오늘도 그가 보여준 되돌림의 정신은 여전히 따라 배워야 할 사표로 작동한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6-19

[그때와 지금] 조선총독부 토지조사사업 완료···하루아침에 대지주 된 일인 부부

1918년 6월 18일은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1910년부터 8년 동안 전 국토를 대상으로 실시한 토지조사 사업이 끝난 날이다. 이 사업으로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 소유 땅 마을 또는 문중의 공유지 그리고 황무지들은 모두 총독부 소유가 되었으며 땅을 빼앗긴 수백만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굴러떨어졌다. 대지주가 된 총독부는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후지흥업 등 토지회사와 이주민들에게 헐값으로 내주었다. 사대관모를 차려 입고 원삼에 족두리로 치장한 나이 든 신랑.신부(사진=독립기념관 소장)는 그때 조선으로 건너와 대지주가 된 일본인 부부다. 그들은 전통적 양반 지주들과는 다른 얼굴의 '흡혈귀'였다. 당시의 일제는 우리의 토지를 약탈한 드라큘라였다는 것이 우리 시민사회의 보편적 역사기억이다. 드라큘라에게 피를 빨리지 않았다면 한 세기 전 개화기에 우리 민족은 이미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루었을 터인데 일제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냉전시대에 우리는 영화처럼 피아와 선악 구분이 선명한 이분법으로 식민지 시대를 보았다. 그때 누구도 식민지 시절 수탈이 있었을 뿐 개발은 없었다는 한국사학계의 공든 탑 '수탈론'에 물음표를 달지 않았다. 냉전이 깨진 후 민족과 민중을 주어로 하는 '내재적 발전론'은 통계라는 객관적 지표를 앞세운 경제성장 사학자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자생적 근대의 싹이 텄었다고 보지 않는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6-18

[그때와 지금] 시대마다 다른 죽음의 이미지, 중세엔 '메멘토 모리' 경구 유행

흑사병으로 인구의 절반가량이 사망하는 참극을 겪은 중세 말기 유럽만큼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 시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는 호소가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죽음의 이미지는 멸망과 덧없음이었다. 14세기에는 죽음이 초래하는 육체적 파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무시무시하게 드러낸 무덤들이 등장했다. 어떤 무덤의 비석에는 "이 무덤을 구경하는 사람도 머지않아 악취 풍기는 시체로 구더기의 먹이가 될 것"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저승사자가 낫을 들고 히죽거리는 모습 마귀가 지옥에서 고통으로 절규하는 사람들을 불로 지지는 잔혹한 모습을 담은 그림들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독일 뉘른베르크의 성 제발두스 교회에는 1330년경 제작된 석상 '현세의 왕'이 있다. 웃고 있는 앞모습(사진 왼쪽)은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는 왕이지만 등(사진 오른쪽)에는 뱀과 구더기들이 기어 다닌다. 역사가이자 문명비평가인 아널드 토인비는 미국인들 사이에 죽음을 '입에 올려서도 안 되는 것'으로 여기면서 죽음의 불가피성에 직면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풍조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오직 인간만이 자기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런 풍조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토인비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형제자매와 사별한 경험이 있던 1세기 전만 해도 죽음은 삶에 대단히 가까운 것이었다. 얼마 전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 판결로 '죽음의 의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아옹다옹하는 각박한 세태에 죽음문화의 성숙이 성찰적 삶을 이끄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6-17

[그때와 지금] 신랑감 옛 사진 보고 결혼 결정, 먼 하와이로 떠난 '사진 신부' 들

1903년 1월 초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겔릭(Gaelic)호를 시발로 65척의 선편이 통감부에 의해 이민 길이 막히는 1905년까지 7226명을 실어 날랐다. 1904년 6월 17일에도 하와이행 이민선은 기적을 울리며 인천항을 뒤로했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1850년대와 1880년대부터 이민사회를 이뤄 호락호락하지 않은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자들을 대체할 인력을 조선에서 구했다. 한인 노동자들이 '국제적 경험이 없는 순진한 어린이 같은 사람들'이자 '가난한 나라에서 너무 힘들게 살다 보니 값싼 임금에도 만족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라 없는 그들은 소나 말처럼 채찍질을 당하며 '죽지 못해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 모든 차별과 착취를 이겨내고 새 터에 뿌리를 내려갔다. 그러나 그때 그곳에 여성은 637명밖에 없었기에 수많은 노총각들이 먼 고국으로부터 신붓감을 구했다. 1000여 명의 '사진신부(Picture Bride)'가 1910년부터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되는 1924년 5월 15일까지 고국을 등질 때 찍은 젊디젊은 남편감 사진을 들고 하와이로 건너왔다. 그녀들은 배우자가 실제로는 십수 년 이상 연상임을 모르고 태평양을 건넜다. 자기 짝을 찾아 흩어지기 직전 찍은 추억사진(1913년경. 재외동포재단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현실문화연구 2007년) 속 그녀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농어촌 지역 신혼부부 열 쌍 중 두 쌍 이상이 국제결혼으로 맺어지는 오늘. 한 세기 전 사진신부들의 슬픈 삶은 우리 시민사회를 소스라쳐 깨어있게 하는 거울로 다가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6-16

[그때와 지금] 600년전 영국 농민 대규모 반란, 집권층 '정치 꼼수'로 진압하다

1381년에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난'은 영국 역사상 가장 격심한 농민 반란이었다. 반란의 직접적 원인은 종래의 재산 정도에 따른 누진세 대신 균등한 인두세를 전국적으로 거둬들이려 한 데 있었다. 와트 타일러가 이끄는 반란군은 6월13일 런던을 장악했다. 그날 밤 나이 14세의 리처드 2세는 런던탑에 올라 농민들의 함성과 불길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왕은 이튿날 군중과 만났고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의 양보에 만족한 많은 농민이 이탈했다. 세력이 약해진 타일러의 추종자들은 6월15일 왕과 그의 수행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잠시 가시 돋친 언쟁이 오간 뒤 런던 시장이 농민들의 눈앞에서 지도자 타일러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데다 순진하게도 왕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반란군은 곧 뿔뿔이 흩어졌다. 이를 틈탄 귀족들은 군대를 조직해 반란을 일으킨 마을들을 야만적으로 유린했다. 하층민의 반란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성공 직전에 실패했다. 첫째 상위 계층은 반란 진압에 필요한 재원과 군대를 쉽사리 동원할 수 있었으며 권력을 휘두르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한층 익숙했다. 둘째 하층민들이 직종에 따른 이해관계로 분열되어 있었던 반면 특권 계층은 지배권에 위협을 받을 경우 항상 연합 전선을 펼쳤다. 끝으로 하층민은 공통된 이념이나 장기적 프로그램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의 반란은 착취에 대한 본능적 반발이었고 눈앞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급급했다. 그들의 투쟁은 거의 승리에 가까워진 순간 와해됐고 겁을 먹은 만큼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귀족들의 반격 앞에 무력하게 노출됐다. 리처드 2세는 '정치적 꼼수'로 위기를 넘겼다. 아직 대중의 정치의식이 성숙하지 못한 600년 전 세습왕조 시절에나 통했던 수법이다. '역사의 교훈'을 아는 요즘 시민의 정치 수준은 역사상 최고조에 이른다. 대통령이 진정성을 보여 준다면 납득하지 못할 국민이 아니다. 선거에 의해 정통성을 부여받은 그것도 530만 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대통령답게 국민 앞에 나서서 당당히 설득할 수는 없는 걸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6-15

[그때와 지금] 조선 근대화 막은 위안스카이, 멋대로 임금 폐위 도모하기도

1882년 6월 임오군란을 기화로 3000명의 중국군이 들어왔다. 중국의 간섭을 주권 침해라고 생각한 개화파 인사들은 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나 중국군의 절반이 월남(베트남)으로 급파되기에 이르자 일본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켜 중국을 내몰려 했다. 그때 25살의 풋내기 장교 위안스카이(1859~1916)는 이들의 세상을 '3일 천하'로 만들어 버렸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밀려날 때까지 그는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면서 조선을 실질적으로 중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무능한 왕을 신속히 폐하고 이씨 중 현명한 사람을 골라 새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 심지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중국을 막으려 한 인아거청책을 펼친 고종을 어리석은 임금으로 몰아 폐위하려 할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청일전쟁으로 중국으로 쫓겨 간 후 패배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변법자강운동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는 우리의 근대화 노력도 철두철미 가로막았다. '태평십년(1885~1894)' 동안 우리에게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은 물론 세상을 알기 위한 교육의 기회마저 주려 하지 않았다. 청일전쟁 직후 윤치호가 "나는 조선에 대한 중국의 극악무도함을 너무도 증오하므로 다른 나라의 지배는 나에게는 비교적 견딜 만하다"고 일기에 적을 정도로 핍박은 심했다. 중국은 일본이 대륙침략에 나선 뒤 고통을 절감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일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던 중국은 조선이란 방패를 잃은 아픔을 뼛속 깊숙이 새겼다. 3대째 권력 세습을 이야기하는 북한왕조에 또 하나의 임오군란이 터지길 중국은 바랄지도 모른다. 과거를 들여다보다 보면 세기를 훌쩍 건너뛰어 지금 여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진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6-11

[그때와 지금] 그리스 문명 이어받은 이슬람, 몽매한 서유럽을 '개화' 시키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14세기 초 유럽 수도사들이 '아랍어 문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도원 사서들에게 아랍어 해독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됐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아랍어를 중세 유럽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번역했다는 것은 서유럽인이 이슬람으로부터 뭔가 배웠음을 뜻한다. "대체 서유럽이 아랍으로부터 뭘 배운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근대 이후 서양문명이 이슬람을 압도했던 까닭에 우리 뇌리에는 '이슬람문명은 서양문명보다 뒤떨어진 문명'이라는 부정적 고정관념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유럽이 이슬람보다 우월하다는 시각은 '최근 수백 년'에 한해 맞는 말이다. 서기 7세기 이후 500년 동안 이슬람은 고대 그리스의 과학.철학을 소화해냄으로써 서유럽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문명을 건설했다. 이슬람은 단순히 그리스 학문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독창적으로 끌어올렸고 '야만 상태'의 서유럽은 12세기 이후 이슬람 학자들이 소화한 그리스 학문을 받아들임으로써 문명을 도약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대표적 사례다. 유럽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그리스어→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아랍어→라틴어'로 중역된 텍스트를 통해 처음 그리스 사상을 접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기독교에 융합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역사가들이 '12세기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서유럽의 번영은 이슬람의 학문적 성취가 없었다면 이룩될 수 없었다. 지난 4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집트 카이로 대학에서 15억 이슬람교도들을 향해 화해를 제안하는 역사적 연설을 했다. 그는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과 싸우는 것이 미국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고정관념 깨뜨리기'는 한때 서양이 스승으로 받들었던 이슬람의 위상을 재인식하는 것으로 출발점을 삼아도 좋을 듯싶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6-10

[그때와 지금] 조선군의 피로 물든 신미양요, 집권층 오만·무지가 부른 비극

1871년 6월 10일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미 아시아함대가 나타났다. 9인치 포를 뽐내며 모노카시호가 선두에 섰고 곡사포를 실은 4척의 군함이 뒤따랐다. 그 뒤에는 팔로스호가 상륙용 보트 22척을 끌며 모습을 나타냈다. 포함의 포신이 불을 뿜었고 초지진은 초토화됐다. 다음날 미군은 진무 장군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 공략에 나섰다. 함포와 상륙부대의 곡사포 포격에 맞서던 143문의 조선 대포는 곧 숨을 죽였다. 한 시간 동안 휘몰아친 집중포화가 잦아들자 광성보 정상에서 나부끼던 장군의 군기는 퍼비스와 브라운 두 병사의 손에 끌어내려졌다. 가로 세로 4.5m의 대형 수자기 앞에 총을 잡은 채 서있는 사진 속 두 사람이 그들이다. 한 미군 병사는 그날의 처절한 전투를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군은 반격하기 위해 탄약을 갈아 넣을 시간이 없자 담장 위로 기어올라 돌을 던져 우리의 진격을 막아보려 했다. 창검으로 맞서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맨주먹으로 싸우며 침략군의 눈을 멀게 하려고 모래를 뿌려댔다. 어떤 이는 목을 찔러 자살하거나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날 폐허가 된 광성보에는 총탄을 막는다는 아홉 겹으로 솜을 둔 두터운 무명 전투복을 입은 채 숨진 전사자가 243명이나 됐고 옷에 불이 붙은 채 뛰어내려 바닷물을 붉게 물들인 병사도 100여 명을 헤아렸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었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슐레이 소령은 적이지만 조선군이 보인 감투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한 미군의 피해 상황에 비춰 그때 전투는 명백한 패전이었다. 그때 우리의 역사시계는 거꾸로 갔다. 대원군의 쇄국 양이정책은 명백한 시대착오다. 힘의 정치가 다시 작동하는 오늘. 제국 미국에 핵을 무기로 맞서려는 북한만이 아니라 우리의 위정자들에게도 교훈을 주고 있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6-09

[그때와 지금] 러시아 부흥시킨 표토르 대제, 농민층 뺀 '그들만의 개혁' 한계

1697년 러시아는 250명의 젊은 귀족으로 구성된 '대사절단'을 서유럽 각국에 파견해 유럽 과학을 습득하도록 했다. 표트르 황제는 신분을 숨긴 채 사절단의 일원으로 동행했다. 당시 25세 청년이던 그는 18개월 동안의 순방 기간에 정치.외교 기법 외에도 목수.선원.병기공.대장장이.치과의사 등 14가지나 되는 다양한 기술을 익혔다. 1698년 러시아 귀족들은 막 유럽에서 돌아온 표트르를 알현하기 위해 속속 궁에 모였다. 이때 서양식 옷을 입은 표트르는 가위를 들고 귀족 중 신분이 가장 높은 자들부터 수염을 싹둑 잘라버렸다(그림). 당시 러시아인에게 긴 수염은 자부심을 상징했고 러시아정교에서는 수염 깎는 행위를 이단시했다. 그러나 표트르는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러시아인의 긴 겉옷과 긴 수염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지를 깨달았다. 표트르는 모든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수염을 깎도록 명령했고 수염을 기르는 자에게는 귀족 60루블 평민 30루블이라는 무거운 '수염세'를 부과했다. 그 다음은 옷이었다. 몇 달 후 표트르는 가위를 들고 시종들의 기다란 소맷자락을 잘라냈다. '소맷자락이 수프에 빠지는 등 온갖 말썽을 일으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개혁 덕분에 러시아는 유럽의 대국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폐해도 컸다. 표트르가 흥미를 보인 것은 유럽의 기술뿐이었다. 그는 유럽의 의회정치에는 무관심했고 전제정치를 강화시키면서 농민의 이익을 무시했다. 징병과 세금으로 그들을 파멸시켰고 결핍과 무지에 빠져들도록 방치했다. 개혁으로 이익을 얻은 것은 상층계급뿐이었고 그들은 농민과 더 이상 공통점이 없었다. '두 국민' 사이에는 심각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원인 중 하나는 분명 이 '균열'이었다. 소통 거부와 일방주의의 쓴 열매를 피해가는 정치적 지혜는 오늘도 필요하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6-08

[그때와 지금] 종교에 자유 뺏긴 갈릴레이 돈에 짓눌려 인문학 퇴조

올해는 유엔이 선포한 '국제 천문의 해'다. 갈릴레이(1564~1642)가 망원경으로 달과 목성의 위성들을 관측한 지 400년 되는 해를 기념해 '국제 천문의 해'로 정한 것이다. 과학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는 이 시대에 갈릴레이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갈릴레이 천체 관측 1년 전에는 영어권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존 밀턴(1608~1674)이 태어났다. 밀턴 탄생 400주년을 맞이한 지난 한 해 동안 영국과 미국에서는 각종 행사로 떠들썩했지만 우리 사회에는 밀턴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영어 교육에 천문학적 비용을 지출하는 나라의 반응치곤 뜻밖이다. 영어를 오로지 먹고 사는 일에만 결부시키기 때문일까? 지금 우리의 경제 규모는 세계 13위이지만 국가 브랜드는 33위에 머물러 있다. 인문정신 없이 국격(國格)이 올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밀턴이 갈릴레이를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 것이다. 밀턴은 1638년부터 1년3개월 동안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1639년 3월 귀로에 피렌체에 들러 종교재판으로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 있던 갈릴레이를 만났다(그림.맨 왼쪽이 갈릴레이 오른쪽 끝은 밀턴). 당시 밀턴은 31세 갈릴레이는 75세였다. 밀턴은 서사시 '실낙원'에서 두 차례나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달 표면을 관찰하는 모습을 담았다. 하지만 밀턴이 갈릴레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은 언론자유의 경전으로 불리는 '아레오파지티카'에서였다. 그는 이 책에서 자유를 빼앗긴 갈릴레이를 언급하면서 종교재판으로 인해 이탈리아의 학문이 굴욕적인 상태에 빠져 있음을 비통해했다. 대학들의 신학기 수강신청 과정에서 폐강된 강의 대부분이 인문학 강의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동아시아 문명사' '문화의 철학적 이해' 같은 것들이다. 취업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대학생들은 인문학보다는 취직에 당장 도움되는 과목만을 중점적으로 수강한다. 17세기의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의 억압으로 인해 자유를 상실했다면 오늘의 인문학은 자본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현실 세계에 눈을 돌리는 젊은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문제는 상아탑에 안주하며 바깥세상과 소통할 줄 모르는 인문학 교수들이다. 젊은이들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상 인문학은 좀 더 친절하게 그들을 찾아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광장(아고라)을 누비고 다니며 시민들을 찾아다녔듯이.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6-05

[그때와 지금] 110년 전 여행가 비숍이 본 조선

도포 차림에 갓 쓴 남장으로 노새를 탄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대표적 여성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사진 맨 오른쪽 1832~1904). 그녀는 1892년 여성으로서는 처음 영국지리학회 회원이 된 이듬해 한국여행을 마음먹었다. 1894년에서 1897년에 걸쳐 네 차례나 이 땅의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피며 체험하고 관찰한 바를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1897)에 담았다. 이미 일본과 중국 그리고 중동 등지를 탐사한 경험이 있던 그녀의 예리한 눈은 우리의 치부를 꿰뚫는다. "한국은 특권계급의 착취 관공서의 가혹한 세금 총체적인 정의의 부재 모든 벌이의 불안정 비개혁적인 정책 수행 음모로 물든 고위 공직자의 약탈 행위 하찮은 후궁들과 궁전에 한거하면서 쇠약해진 군주 널리 퍼져 있으며 민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미신 그리고 자원 없고 음울한 더러움의 사태에 처해 있다." 그녀는 조선왕국에 대해 총체적 사망 선고를 내렸다. 비숍만이 아니라 그때 우리를 둘러본 서구인들은 한목소리로 어디에도 사회정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공적 영역이 총체적으로 썩어 문드러졌다는 사실을 아프게 꼬집었다. 선진과 후진 진리와 미신 문명과 야만 합리와 비합리 강자와 약자 타자와 자기 백인과 비백인 그리고 진보와 정체. 비숍만이 아니라 그때 서구인들은 이항대립의 눈으로 한국을 낮추본 것도 사실이다. "한국인들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한 민족이므로 정직한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비숍이 예언한 대로 시민으로 진화한 오늘의 우리들은 개화기 서양인들이 남긴 우리의 특수성에 관한 관찰기록들을 편견의 산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일전쟁 승패의 분수령이 된 전투가 벌어졌던 평양의 주민들이 일본군을 보는 시선에 대해 비숍이 남긴 기록은 우리의 상식에 반한다. "사람들은 일본군을 아주 미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의해 평화로운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평양사람들은 근대적으로 훈련받은 일본군이 떠나고 나면 시민들의 권리를 얕보고 시민들을 무수히 폭행하고 강탈하는 한국의 구식군대가 그들을 괴롭힐까봐 매우 걱정했다." 일본의 침략과 수탈이 우리의 주체적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우리 몫의 책임 찾기가 필요한 오늘. 실패의 역사를 거울 삼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6-04

[그때와 지금] 다윈 '총리 만나봬 영광' 감격…역사는 '다윈 만난 총리가 영광'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은 생물학자 다윈 생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다윈의 학문적 업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거처를 방문했다. 글래드스턴이 누구인가. 19세기 후반 총리를 네 차례나 역임한 존경받는 거물 정치인이었다. 당대 최고 정치지도자의 방문을 받은 다윈은 이렇게 소감을 남겼다. "그토록 위대한 인물의 방문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두 사람의 만남을 '역사적'으로 해석한다. 다윈이 글래드스턴의 방문을 영광스럽게 여긴 것은 그의 겸손한 성품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그것은 다윈에게 '역사적 안목'이 결여돼 있었음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대의 시각'으로 보면 다윈이 명예롭게 여기는 게 맞을지 모르나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다면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다윈이 아니라 오히려 글래드스턴이라는 것이다. 후대에 미친 영향력과 역사적 중요성이란 점에서 다윈은 글래드스턴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 아무나 붙들고 "글래드스턴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보라. 아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다윈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둘의 경우에서 보듯이 한 인물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객관적인 평가가 되기 어렵다. '그때'와 '오늘'의 평가가 180도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한 인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관 뚜껑에 못을 박은 뒤에 가능하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세력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라야 가능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역사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그를 일방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국민도 많지만 저평가하는 국민 또한 적지 않다. 그의 빛과 그림자 중 어느 한쪽에 주목한 평가일 것이다. 어느 쪽이 역사적 평가에 근접한 것인지 당장은 알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안갯속'이기 때문이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6-03

[그때와 지금] 박정희 정부 한·일 국교 정상화…'민족주의 죽었다' 6·3 시위 발발

중국 대륙이 공산화될 위기에 처한 1940년대 후반 미국은 일본 점령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그때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막는 반공의 보루로 그리고 한국은 일본 방위를 위한 완충국으로 삼으려 했다. 일본은 더 이상 침략의 과거사를 반성해야 할 패전국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아줄 동맹국으로 떠올랐다. 반일을 반공과 함께 국시로 내건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한 첫 단추로 일본과 협상에 나섰다. 1964년 3월 23일 김종필은 이케다와 국교정상화에 합의했다. 마침내 미국이 꿈꾼 일본을 한국의 위에 놓는 지역통합(regional integration) 전략은 실현되었다. 다음 날 서울시내 주요 대학 학생들은 한목소리로 대일 국교 정상화 교섭의 반민족성과 몰주체성을 성토하며 거리로 나섰다. "공화당 정부가 내걸었던 민족주의는 어디로 사라져 가버리고 우리의 우방 미국이 덮어씌운 면사포가 정부를 현혹한다. 우리는 정부에게 묻는다. 이것이 비밀 회담이 타결될 당위인가. 대등한 주권국가로서의 외교가 그 꼴이어야만 하는가"(고려대 3.24 선언문). 애초에 지식인 사회의 쿠데타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한일협정 협상 과정에서 군사정권의 몰주체성과 비민주성이 드러나면서 밀월은 깨졌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 가고 있다. 넋 없는 시체여!" 김지하는 1964년 5월 20일 '반민족적.반민주적 민족주의 장례식'에서 박정희 정권이 말하는 민족주의의 사망을 선언하는 조종(弔鐘)을 울렸다. 6월 3일 서울시 주요 가로는 1만 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 행렬로 넘쳐흘렀다. 흩날리는 빗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대학생들의 굳은 표정은 그들의 고뇌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와 "박정희 정권 퇴진"을 외친 서울 주요 대학 학생들의 시위가 정점에 오른 그날 비상계엄령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그때 '6.3 학생운동'을 이끈 대학생들은 민족을 주체로 한 민주화에 목말라 한 반면 박정희 정권은 제국과 타협 하에 국가주도형 산업화를 꿈꾸었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을 씨줄과 날줄 삼아 다원화되고 풍요로운 시민사회를 일군 오늘. 보다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한 관용과 대화가 더없이 필요한 시점이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6-02

[그때 오늘] 로마 약탈서 유래한 '반달리즘' 반달족 입장에선 억울한 누명

서기 455년 6월 2일 북아프리카에 독립왕국을 건설한 게르만족 일파 반달족(Vandals)이 지중해를 건너 로마를 약탈했다. '고의 또는 무지에 의해 예술품이나 공공시설을 훼손하거나 약탈하는 행위'란 뜻의 영어 '반달리즘(Vandalism)'은 이렇게 해서 생겼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군사정권이 이슬람 문화에 반한다는 이유로 세계적 문화유산인 '바미얀 석불'(사진.파괴되기 전 모습)을 로켓포로 산산조각 낸 행위 2008년 2월의 숭례문 방화 사건이 반달리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반달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에서 살다가 독일.프랑스.스페인을 거친 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에 정착했다. 반달리즘이란 말은 프랑스 주교 앙리 그레과르(1750~1831)가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당이 자행한 파괴활동을 반달족이 저질렀다고 전해진 범죄행위와 비교하면서 처음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반달리즘이라는 말 자체가 반달리즘을 내포하고 있다. 5세기의 반달족은 이미 로마 문화를 받아들여 로마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아프리카에서 자기 언어를 포기하고 라틴어를 채택했는가 하면 문학.신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오히려 로마의 문화와 예술은 로마제국 말기의 노예나 빈곤층 그리고 후대의 예술가와 로마의 보통 사람이 더 많이 파괴했다. 예컨대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 그리스 양식을 흉내 내려고 할 경우 가장 쉬운 방법은 로마시에 있던 오래된 건축물에서 기둥 등을 가져다가 약간 손을 보면 되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로마'를 만들기 위해 '옛 로마'를 파괴한 이는 로마인 자신이었다. 물론 미켈란젤로 같은 일부 예술가들이 그러한 행위를 비난하기도 했지만 대개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533년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휘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북아프리카에 상륙해 두 주일 만에 수도 카르타고를 함락했고 1년이 못 되어 반달족의 흔적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수많은 반달족 구성원은 동로마제국 군대의 일원으로 편입됐다. 이로써 거대한 인종 도가니가 될 동로마제국에 한 종족이 추가됐다. 반달족은 억울하게도 실제와 다른 나쁜 평판만을 후대에 남긴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역사 도시' 서울이 무분별한 개발과 팽창으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개발의 미명 아래 또 다른 문화파괴가 자행되는 것이나 아닌지 경계해야 할 때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6-01

[그때 오늘] 선진기술 과시한 런던 박람회, 2012년엔 여수 엑스포 나선다

1851년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는 신기하게 생긴 건축물이 등장했다. 강철과 유리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전통적인 건물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이 건물을 수정궁(水晶宮.Crystal Palace)이라고 불렀다(그림). 그러나 지금은 이 건물을 볼 수 없다. 1936년 11월 30일 밤에 일어난 대화재로 모두 타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서만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수정궁은 강철과 유리 건축 설계로 유명한 건축가 조지프 팩스턴(1801~65)의 작품으로 당대 유럽에서 가장 웅장하고 상상력이 빛났던 건축물로 평가된다. 1851년 5월 1일 세계 25개국 대표들이 수정궁에 모였다. 유례없는 규모로 진행된 이 대회의 정식 명칭은 '만국산업생산품 대박람회'(약칭 '수정궁 엑스포')였다. 사람들은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진보와 번영의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 박람회는 영국이 '세계의 공장'임을 입증하는 행사였다. 유럽 여러 나라의 수많은 산업 제품이 관람객들의 찬탄을 자아냈지만 어떤 외국 제품도 영국의 놀라운 공학기술 제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특히 전시장인 수정궁은 그 자체가 하나의 '경이'였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은 이 박람회를 통해 선진 기술을 마음껏 과시했다. 박람회가 개막하던 날 런던 전체는 축제분위기로 들떴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수정궁의 개막 테이프를 잘랐다. 행사를 마친 그날 저녁 32세의 빅토리아 여왕은 일기에 "영국 역사상 가장 성대하고 또한 아름답고 영예로웠던 날"이라고 적었다. 5개월이 넘는 행사 기간 동안 600만 명 이상이 입장했는데 당시 영국의 전체 인구 2100만 명에 견주어 볼 때 이는 엄청난 숫자였다. 수많은 시골 사람들이 난생처음 기차를 타고 런던을 구경했고 신기한 산업 제품들을 관람하면서 세계 일등국민으로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1851년 시작된 세계박람회는 인간.문화.경제.환경.테크놀로지 등을 주제로 총 105회가 개최됐다. 선진국들은 엑스포를 국력신장의 계기로 삼았다. 세계적 명소인 에펠탑이 세워진 1889년 파리 박람회와 기술 강국 일본의 틀을 다진 1970년 오사카 박람회가 대표적인 예다. 우리나라는 2007년 11월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경쟁국 모로코를 제치고 '여수세계박람회(여수엑스포)' 유치권을 획득했다. 2012년 5월 12일부터 3개월 동안 개최된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5-27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